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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17 간사이 여행

[일본/오사카] 오사카성

#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사카성

 

대망의 간사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귀국 편 비행기가 저녁 8시 5분에 떠서, 오전에 한 코스 정도는 더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날이다.

 

마지막 호텔 조식을 먹은 후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우리는 근처 '신사이바시역'으로 갔다.

 

목적지는 '나고야성(名古屋城)', '구마모토성(熊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이라 불리는 '오사카성(大阪城)'!

 

'신사이바시역'에서 미도스지선 지하철을 타고 '혼마치역(本町駅)'에서 내려, 다시 츄오선으로 환승한 후 '다니마치욘초메역(谷町四丁目駅)'으로 갔다.

 

# 신사이바시역에서 다니마치욘초메역까지 가는 지하철표

 

'다니마치욘초메역' 9번 출구로 나오니 '오사카 역사박물관(大阪歴史博物館)'이 우리를 반겼다.

 

 

들어가서 관람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오후에 좀 여유 있게 공항으로 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오사카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 오사카 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일본의 전통가옥

 

'오사카 역사박물관' 옆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 후, 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자 '오사카성'이 그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의 성들은 서양의 성들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사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성들에서는 과거 '해자'의 흔적을 볼 수는 있지만, 현재는 거의 '해자'를 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는데, '나고야성'도 그렇고, '마쓰에성(松江城)'도 그렇고, '하코다테(函館) 고료카쿠(五稜郭)'도 그렇고...

 

내가 가봤던 일본의 성들은 서양의 성들처럼 '해자'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 오사카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해자'를 지나 우리는 '오사카성'의 첫 번째 관문인 '오대몬(大手門)'으로 향했다.

 

'해자' 위로 난 다리를 건너 '오대몬'으로 가는 중간 '오사카성'의 상징 '천수각(天守閣)'이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오대몬으로 가는 다리 위에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낸 천수각 풍경

 

'천수각'을 보는 순간 우리는 기대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어 재빠르게 '오대몬'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해자를 건너 오대몬으로 가는 길

 

 

# 오사카성 오대몬을 배경으로

 

# 오대몬에서 바라 본 길 건너 오사카부 경찰본부(大阪府警察本部)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보였지만, 비는 우리가 오사카를 떠날 때까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높은 습도와 열기만 계속해서 뿜어냈다.

 

덕분에 '오대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입고 있던 옷은 땀범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오사카성 오대몬

 

# 오대몬에서 지헌이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걸어 '오대몬'을 통과하자 '오사카성'의 성벽 역할을 하는 '오데구치마수가다노교세기(大手口枡形の巨石)'가 나왔다.

 

이 거대한 석벽 앞에서 인증샷 남겨주고 우리는 '오사카성'을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을 찾아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 오사카성의 오데구치마수가다노교세기

 

#

오데구치마수가다노교세기에서 지헌이

 

'천수각'으로 가는 입구인 '사쿠라몬(桜門)'의 맞은편에는 '도리이'가 서있고, 그 '도리이' 너머 동상 하나가 서있었다.

 

'오사카성'을 지은 사람이자 우리에겐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豊臣秀吉公銅像)'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37년 3월 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그는 '오나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수하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때 살해당하자, 주고쿠 지방(中国地方)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한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카'를 대신해 전국통일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 후 바로 이 '오사카성'을 쌓았고,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오른 인물이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하다 보니 성씨(姓氏)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왕족과 귀족, 무사들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전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야심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결국 일본의 전국통일로는 모자라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자신의 세를 넓히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대륙 진출을 원하니 조선이 그 길을 열어달라!'는 구실 하에 결국 중세 시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으로 알려진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된 태평성대로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다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왕이 백성을 버리고 궁을 떠나 피난을 가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명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한반도는 조선과 왜 그리고 명나라까지 합세한 3국의 전쟁으로 초토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생겨난 결과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욕심으로 결국 중국은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조선은 이후 '병자호란'까지 연달아 겪으며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국력이 약해져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국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임진왜란' 도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대륙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급사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일본 최고의 영웅의 등장으로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어찌 됐든 왜는 다시 한 번 전국이 분열되는 혼돈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지금 그는 우리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 인물로 기억될까?

 

아마도 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는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난세를 평정한 일본의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결국 그의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영웅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오직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의 우두머리로만 기억될 뿐이다.

 

역사란 것은 기억하고 싶은 역사도 있지만, 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있다. 아마 기억하고 싶은 역사보다 기억하기 싫은 역사가 더 많은 나라 중 하나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싶다. 특히 중국, 일본과 관련된 역사를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더 많다.

 

'오사카성'은 우리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일부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쇠퇴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성일뿐, 우리나라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오사카성' 천수각에 앉아서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을 떠 올려보니 '오사카성'이 우리와 관계가 멀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의 대표적인 전범국 '독일'은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만행들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 자신들이 했던 잘못을 후손들은 절대로 저지르지 말라는 이유에서다.

 

오늘 내가 조카를 데리고 '오사카성'에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역사 중 하나지만, 이를 본보기로 삼아 훗날 선조들이 했던 과오를 똑같이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아직 어려서 지헌이가 삼촌이 '오사카성'을 데리고 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계속 데리고 다니며 알려줄 것이다. 되풀이해서 알려 주다 보면 언젠가는 지헌이도 이해할 날이 있을 테니 말이다.

 

 

#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앞에서

 

지헌이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설명을 해준 후 동상이 있는 곳을 나와 매점에서 시원한 빙수 한 그릇 사 먹고 '천수각'으로 갔다.

 

'사쿠라몬'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가자 넓은 광장이 나왔고, 광장의 북쪽으로 '천수각'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 오사카성 광장에서 천수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씩 찍고 매표소로 갔다. 입장권을 사려고 여권을 보여주니 지헌이는 아직 어려 공짜라고 한다.

 

돈 굳었다고 좋아하며 계단을 올라 천수각 입구에 들어섰다. 비좁아 보이는 천수각 내부에는 이미 관광객들이 꽉 차있어 에어컨을 틀었어도 무지하게 더웠다.

 

전망대에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결국 포기하고 계단을 통해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 도착해 밖으로 나와 오사카 시내를 바라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곳에서 우리나라 쪽을 바라보며 조선 정복의 꿈을 꾸었겠구나 생각하니, 이틀 전 '츠텐카쿠'에서 오사카 시내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가슴 한 편이 씁쓸해졌다.

 

 

 

 

 

 

 

 

# 오사카성 천수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사카 풍경

 

 

# 오사카성 천수각 전망대에서

 

오사카 시내를 바라본 후 '천수각'으로 다시 들어왔다. 전망대 내부에는 기념품 상점이 있었고, 벽에는 거대한 병풍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천수각 전망대 내부 풍경

 

# 천수각 전망대 내부 벽에 그려진 병풍

 

# 천수각 전망대 내부 벽에 그려진 병풍 앞에서

 

비좁은 장소에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더 머무를 수 없어, 내려가는 계단을 이용해 내려왔다. '천수각'은 매 층마다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었다.

 

# 천수각에 전시되어 있는 용과 호랑이 금상

 

# 올라가는 곳과 내려가는 곳이 구분되어 있는 천수각 계단

 

"지헌이 기념품 하나 사줄까?"

 

"아니요!"

 

"왜? 하나 사지!"

 

"맘에 드는 게 없어요. 여기 넘 복잡하니까 우리 빨리 나가요!"

 

지헌이의 재촉에 우리는 '천수각' 구경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 오사카성 천수각

 

# 천수각 구경을 마치고 나와서 지헌이와

 

여행 마지막 날 오사카의 더위는 극에 달해 있었다.

 

나와 지헌이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오사카성'에서의 마지막을 시원한 아이스 빙수로 대신하고, 맡긴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 오사카성 광장 왼쪽에 위치한 매점에서